1. 『초자연적 3D 프린팅』은 소시집까지 포함하면 시인님의 세번째 시집입니다. 이번 『초자연적 3D 프린팅』에 대한 소감을 여쭙습니다.
우선 속시원한 기분입니다. 첫 시집을 낸 이후로 여러 권의 시집을 동시에 묶고 있는데요, 그중 한 권이 나왔으니 이제 다른 시집들에 좀더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하네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지 색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제 딴에는 최대한 ‘사이키델릭’한 느낌을 의도해 제안한 것인데요,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표지만 보더니 “핑크 플로이드 느낌이네”라고 말해준 사람이 무려 두 명이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왠지 추기경의 도포 같기도”라고 말해준 분도 있었네요. 그래서 그건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니 “그게 초자연적 쓰리디 프린팅의 스펙트럼인지도”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2) 평소 번역가로도 왕성히 활동하고 계시죠. 번역은 다른 이의 언어를 이어받아 자신의 언어로 내보내는 치밀한 작업이고, 또한 창작 활동이라는 점에서 시 창작과도 긴밀한 관계를 지닐 것 같아요. 번역과 시 창작이 시인님께 어떤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합니다.
음, 일단 번역과 시 창작은 이어져 있다기보다는 거의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영역인 듯합니다. 번역이 단어 하나하나를 쌓아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는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한 극도로 인위적인 행위임에 반해, 시 창작은 기본적으로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리듬에 올라타지 않으면 안 되는 무위의 행위이니까요.
그래도 번역 일이 시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번역을 하면서 비교적 다양한 문화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 예를 들면,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바닷가에서』를 번역하면서 이슬람 이론서와 초급 아랍어, 향신료와 관련된 책 등을 끊임없이 들춰보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잔지바르 전통 음악을 틀어놓고 제 나름대로 향신료를 잔뜩 넣고 끓인 아프리카식 홍차를 마셔가며 다시 작업에 임했어요. 이렇게 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저는 그 책 안에 말 그대로 쏙 들어가버립니다. 이런 다양한 문화 체험이 저의 정신세계와 시 세계를 저도 모르는 색채와 향기로 물들이는 것은 물론이고요.
3) 시집의 첫 시 「검고 맑은 잠」의 “누군가 밤새 그곳을 서성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서 있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거기 놓인 문진의 무게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밤”이라는 구절에서 현실을 종이 위에 옮기는 글자와, 다시 현실로 육박하며 번져오는 시 사이의 관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 「무한대의 밤」에서 “깨고 나니 꿈이었다”가 반복되는 것이 현실과 문학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치열한 과정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기록하는 현장으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어느샌가 시를 읽는 저 또한 고양감에 휩싸이고 말았어요. 시집의 앞과 뒤를 수놓는 이 시들이 시에 대한 시인님의 관점을 특별하게 밝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부연해주실 수 있으실지요!
저에게는 시인님의 이 질문 자체가 한 편의 시로 읽힙니다. 그래서 몇 차례 연거푸 읽어보았는데, 읽으면서 저 또한 덩달아 고양감에 휩싸이게 되네요. 그래서 특별히 부연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모쪼록 이 질문을 두 번, 세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4) 시집이 나온 시점에서 특별히 시인님의 마음에 남아 있는 시가 있을까요?
시집을 내기 전에는 당연히 「초자연적 3D 프린팅」이나 「무한대의 밤」 같은 장시들을 아끼는 편이었어요. ‘바가텔’을 쓰는 것과 ‘심포니’를 쓰는 것은 거의 모든 의미에서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그런데 시집을 내고 나니 그렇지도 않네요. 시집을 엮는 동안 시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궁리하는 데 가장 긴 시간을 쏟았고, 그래서 저에게는 이 시집이 한편으로, 혹은 많이 양보하더라도 (‘부部’를 기준으로 하면) 네 편으로 보입니다. 각 시들보다는 시들 사이의 흐름이 훨씬 더 중요했어요.
5) 독자분들께 인사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초자연적 3D 프린팅』에 불교를 소재로 한 시들이 여럿 실린 만큼, 『조주록』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내용으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당나라 때 일입니다. 총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한 승려가 어느 날 조주 선사께 가르침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조주는 말했습니다. “죽은 먹었는가?” 승려는 대답했습니다. “먹었습니다.” 그러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발우나 씻게.”
저는 하루에 세 번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마다, 혹은 설거지를 하기 싫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밥 먹는 시간과 설거지하는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은 잡념이 끼어들진 않는, 그런 깨끗한 가을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